금주의 설교

금주의 설교

주일설교모음

[주현절 3주] 포용하는 믿음을 가지라

  • 관리자
  • 2021-01-24 11:00:00
  • hit2192
  • 222.232.16.100

현절3주
포용하는 믿음을 가지라
요나서 3:1~5, 10
 


코로나19로 인해 비대면 예배가 길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상당수 교회들이 피로감과 함께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런 중에 대면예배를 고집하는 교회들은 ‘예배는 곧 생명’이라면서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길게 말씀드리고 싶진 않습니다. 성서는 이웃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대면예배를 드림으로 자신들만 위험에 빠진다면, 자신들이 감당할 몫이겠지만, 이웃의 안전을 위협하고 불안감을 조성한다면 편협한 믿음에 불과한 것입니다.

최근 코로나19 상황에서 이런 행동을 하는 이들은 대부분 기독교 근본주의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어떤 종교든 근본주의자들은 다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근본주의자들은 자신만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이들을 향해 증오를 부추기기 때문에 그 자체에 폭력성이 배태되어 있습니다.



이웃을 배려하지 못하는 종교는 도태될 수밖에 없으며, 이웃들로부터 거부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예배한다고 하지만, 그들이 예배의 감격에 빠져있는 동안 하나님의 이름은 땅에 떨어져 짓밟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지금 이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면 이사야서 1장 13절의 말씀을 대언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시는 헛된 제물을 가져 오지 말아라. 다 쓸모없는 것들이다. 분향하는 것도 나에게는 역겹고, 초하루와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참을 수 없으며, 거룩한 집회를 열어 놓고 못된 짓도 함께 하는 것을, 내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이번 주일 성서일과는 요나서입니다.
요나서는 기원전 8세기에 쓰인 것입니다.
요나는 북왕국 이스라엘 여로보암 2세때 활동했던 예언자로, 니느웨는 조국 이스라엘을 심각하게 괴롭히고 위협하는 나라 앗시라의 수도였습니다. 그리하여 애국심이 강했던 민족주의자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지금의 스페인으로 도망을 합니다.


 

이후, 북왕국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게 멸망당합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역사는 아이러니하지요. 그때, 니느웨가 회개하지않고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심판했더라면, 북왕국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게 멸망당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당시 제국 앗시리아는 잔인하기 그지없는 방법으로 식민지를 다스렸습니다. 주로 점령한 곳을 초토화했고, 필요에 따라 남겨둔 사람들은 강제혼인정책으로 동화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어쩌면 이런 잔인성을 가진 제국에 대한 반발과 끊임없이 자신들을 괴롭히고 넘보는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는 멸망당해야할 도시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할 곳으로 생각하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이후,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한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도 이런 강제혼인정책의 표본의 된 도시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동족이었던 유대인들 조차도 "이방인들과 결혼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지 못했다고 사마리아인들을 경멸했고,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요나의 생각에는 선민인 자신들만 구원의 대상이어야 하는데 이방인들이 포함되는 것도 모자라서, 하필이면 자신들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라니 선뜻 명령을 따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요나는 제국 앗시리아의 잔인성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당연하다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혹시라도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셔서 용서라도 해주신다면 견딜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북왕국이스라엘에게도 큰 위협이 될 것은 뻔한 일이었겠지요. 그래서 니느웨로 가는 도중 지금의 스페인으로 도망을 쳤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요나서 이야기를 잘 알듯이 니느웨는 회개를 했고, 하나님은 그들을 멸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자 요나가 화를 내면서 “차라리 죽는게 낫겠습니다.!” 항변하고 하나님은 “네가 화내는 것이 옳으냐?”하시며 요나를 꾸짖습니다. 요나서는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요나가 회개했는지 안했는지 밝히지 않고 상상은 독자에게 맡깁니다.



오늘 성서일과를 통해서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먼저 1절에 “주님께서 또다시 요나에게 말씀하셨다.”는 말씀을 생각해 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도망치다가 큰 물고기 뱃속에서 지냈습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던 요나는 정작 죽을 지경이 되자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외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응답하셔서, 물고기가 요나를 토해내게 합니다. 그러니 이제, 요나는 꼼짝없이 하나님께서 전하라는 말씀을 니느웨에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열정적으로 전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둘러보는데만도 사흘이나 걸릴 성읍인데, 하룻길만 걸으며 외칩니다. “사십 일만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질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요나가 원하지 않는 일이 생긴 것입니다.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모두가 굵은 베옷을 입고 회개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재앙을 내리지 않으십니다. 


여기까지가 오늘 성서일과 구약본문의 말씀입니다.
병행본문을 살펴보면 시가서 시편(62:5~12)은 ‘행한 대로 갚으시는 하나님’이시니 하나님 앞에 속마음을  털어 놓으라‘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신서 고린도전서(7:29~31)의 말씀은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지혜롭게 행동하라‘ 말씀하십니다. 복음서 마가복음(1:14~20)은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하시며 제자를 부르시는 내용입니다.

이 말씀들을 묶는 하나의 단어는 ’회개‘입니다. 





’회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제자가 된 이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편이었던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것‘처럼, 그동안 당연하게 여기던 것을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방민족이던 니느웨도 멸망당해야 마땅한 도성이었지만 ’회개‘를 통해서 지혜롭게 임박한 재앙을 피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선‘과 ’악‘을 나누지만, 하나님의 자비는 모두에게 열려있는 것입니다.

요나를 통해서 우리는 어떤 메시지를 들어야겠습니까?



 

첫째로, 속 좁고 이기적인 나 중심의 신앙생활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매주일,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예배를 생명처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로인해 이웃이 해를 당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이름이 조롱당하는 결과로 나타난다면 자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민족에서 확장되는 것을 거부하는 유대인들의 민족주의와 배타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구원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신앙인만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은 이들도 똑같이 소중하게 여기시고 구원해 주시기 원하시는 분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저항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요나는 기를 쓰고 하나님에게서 달아나려고 애쓰지만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셨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시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왜 우리를 부르셨는지 우리는 늘 깨어 생각해야 합니다. 깨어있지 않으면 다시스로 도망하는 요나와 같은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하나님께 낚인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론 제자들이 부름 받은 후에 세상살이의 방편이었던 그물을 버렸던 것처럼 우리도 세상의 방편들과 세상의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세상은 경쟁, 성공을 위해서 살아가라고 합니다. 혹은 어떤 이념을 절대적인 것처럼 여기며 살아가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벗어날 수 없다면 즐기라!”하는 말이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간혹 내 생각과 달라도 하나님의 생각에 맞추며 살아가려고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이루시고자 했던 귀한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셋째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우리의 수고와 무관하게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거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수고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소중한 것들입니다.
우리가 수고해도 만들 수 없는 것, 우리가 아무런 수고도 하지 않았는데 우리가 누리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햇살과 바람, 들에 피어나는 꽃과 나무,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토대가 되는 모든 것들은 우리의 수고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귀한 창조물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선물로 받아 공짜로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있습니다. 그림자 노동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그림자 노동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잘나서 사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노동에 힘입어 살아가고, 우리는 동시에 누군가에게 그림자 노동으로 봉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은 편 가르기합니다. 마치 요나처럼 “니느웨는 망해버렸으면 좋겠어, 망하는게 당연해, 망하는 거 구경이나 해야지!”하는 마음을 갖고 살아가게 만듭니다. 이런 세상풍조에 휩쓸려 살아가지 말고 세상 풍조를 떠나 초연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요즘의 세상풍조는 그리 건강하지 않습니다. 거기에 휘둘리지 마십시오.

에베소서 2장 2절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그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주현절 셋째주일에 하나님은 요나서를 통해서 ’편협한 믿음을 극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포용하는 믿음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나 중심의 신앙생활을 극복하시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시고, 모두의 수고를 자신의 수고와 몫으로 가로채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세상 풍조를 따라 살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우리도 포용하면서 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거둠 기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 지금도 길 잃고 방황하는 이들을 찾아 진리의 길로 인도하시는 주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주님, 우리의 편협한 신앙을 돌이킬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속 좁고 나 중심적인 신앙생활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에 나의 생각과 달라도 순종하게 하시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입어야할 존재임을 깨닫게 하옵소서. 우리의 신앙이 나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이웃을 향하게 하시고, 신앙인들이 교회가 이 세상의 빛으로 소금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음성설교듣기
http://www.podbbang.com/ch/1775820?e=23943875
예배영상보기
https://youtu.be/BR1PDWQuAs4

게시글 공유 URL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