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절 첫째 주일
그날을 기다리는 사람들
이사야 64:1~9
대림절은 ‘기다림의 절기’입니다.
‘기다림’이라는 단어는 소망이나 희망과 연관이 있는 긍정적인 단어입니다. ‘아직은’이라는 미완의 의미가 있지만, ‘기다림’은 여전히 희망의 단어입니다. 그래서 대림절은 희망의 절기입니다. 기다림의 계절,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는 대림절기에 오늘 예배하시는 분들마다 간절히 기다리는 기쁜 소식들이 들려오길 축복합니다.
■ 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지우 시인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사랑하는 연인을 기다리는 청춘남녀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기다리고 기다려도 ‘너’는 오지 않습니다. 그러자 시인은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로 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시인은 ‘나는 너에게 가고 너는 지금도 오고 있다.’고 합니다.
시인의 ‘너’는 단순히 청춘남녀의 사랑하는 애인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있어야 하지만, 현재는 부재하는 그 무엇, 성취되어야만 하는 그 무엇입니다. 이 시는 1991년 발표되었지만, 황지우 시인은 이 시를 1986년에 썼다고 합니다. 요즘 ‘서울의 봄’이라는 영화가 1980년대를 다시 소환하고 있지만, 그 시절은 참으로 암울했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니 시인이 이 시에서 기다리는 ‘너’는 한용운의 '님'처럼, 자유, 민주주의 같은 것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냥 기다리기만 한다고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너를 마중하기 위해 ‘너에게로 가는 것’입니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로 가고 있다.’는 시의 마지막 문장을 ‘주님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주님에게로 가고 있다.’는 문장으로 바꿔봅니다. 오시는 주님과 주님을 마중하는 삶이 조화를 이루어 가슴 쿵쿵거리는 설렘의 대림절을 보내시길 바랍니다.
■ 성서일과의 배경(이사야서 64:1~9)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2800년 전, 남왕국 유다의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가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읽은 이사야서의 말씀은 신학적으로 제3이사야서에 해당합니다. 제3이사야서의 시대적인 상황은 남왕국 유다가 바벨론이라는 신흥강대국에 포로로 끌려간 후입니다. 포로생활이 정점에 달했을 때, 바벨론 강가에서 조국을 그리워하며, 예루살렘 성전을 복구할 날을 소망하던 시기입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음을 알기에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하늘을 가르시고 내려오셔셔, 불이 섶을 사르듯 불이 물을 끓이듯 하시어, 이방 나라들이 주 앞에 떨게 하여 주십시오.”
고국에 돌아가고 싶은 간절한 기다림의 청원입니다. 이런 청원을 하며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돌아보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죄로 인해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라고 한탄합니다. 그러나 한탄에 머물지 않고 고백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님을 우리를 빚으신 분이십니다(8).” 회개합니다. 회개는 돌이킴이요, 돌아감이요, 주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황지우 시인의 시에서 ‘너를 기다리다가 너에게로 가는’ 것과 같습니다.
■ 선지자의 기다림
포로 생활 중에 선지자는 주님의 강림을 기다립니다.
그 주님은 ‘하늘을 가르고, 불이 섶을 사르듯, 불이 물을 끓이듯’ 예측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을 행하시며 오실 것을 예언합니다. 그 누구도 들어 본 적도 없고 들어보지 못한 일들, 자신들이 믿는 신은 감히 할 수도 없는 일을 행하시며 오실 주님을 예언합니다. 산들이 무서워서 떨 만큼 강력한 주님이 오셔야 자신들을 포로로 삼고 있는 강대국들을 평정하실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무서운 주님이 오시면, 형식적인 제사를 지내고.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는 자신들이라고 무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는 간구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빚으신 분이시니, 진노를 거두어 주시고,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 말아주십시오(사 64:8,9).”
이런 간절한 소망을 품고 주님을 기다리는 예언자는 황지우 시인이 ‘기다리는 너에게로 가는 것’처럼, 오시는 주님에게로 갑니다. 주님에게로 가는 사람들, 회개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5절 말씀에 ‘정의를 기쁨으로 실천하는 사람과 주의 길을 따르는 사람, 주를 기억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이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기다리지 않는 사람들, 주의 이름을 부르지도 않고, 의지하려고도 하지 않는 이들에게 주님은 얼굴을 숨기시고, 죄를 물어 소멸시켜 버리시는 것(7)입니다. 지금 당장은 현실이지만, 예언자는 조국의 암담한 현실을 속에서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기다리고, 주님에게로 가는 것만이 살 길이라고 예언하는 것입니다.
■ 삶은 기다림이어서
한웅재 목사의 ‘삶은 기다림이어서’라는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삶은 기다림이어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순간들
주의 뜻을 묻고 기다리는 게
나 걸어가야 할 길이라서
삶은 기다림이어서
견디기 힘든 날들 수많은 아픔들
주 내게 주신 그 나라를 바라며
이겨내는 게 나의 길이라서
캄캄하기만 한 두려운 내 앞길과
참기 힘든 시련과
어려운 상황 속에서
날 품어 주신 주를 기대하며
주가 주신 나의 길을 가려 해
...
삶은 기다림이어서
주를 바라고 기다리는 게
내 삶의 이유라
이 길을 걸어가네
주 오실 그날 기대하며
이 길을 따라 걸어가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닥쳐오고, 견디기 힘든 아픔이 엄습하고, 인생길이 캄캄하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도 주를 바라고 기다리는 것이 내 삶이므로 주님의 길을 따라 걸어 간다.’는 고백입니다. ‘기다림’의 전제조건은 ‘결핍’입니다. 모든 것이 완벽하면 기다림이 아니라 ‘이대로만!’의 삶에 머물게 됩니다. 삶은 기다림입니다. 주님의 뜻을 묻고, 삶에 대해 깊이 묵상하면 ‘삶은 기다림’이며, 그 기다림의 시간이 복된 시간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기다림의 신앙은 종말론적인 신앙과 맞닿아 있습니다.
■ 기다림에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추수감사주일에 ‘나의 감사를 넘어 너의 감사로 나아가야 한다.’는 말씀을 드린 바 있습니다. 개인적인 영역의 기다림이 의미 없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만 매몰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를 넘어 너의 기다림, 교회와 국가 더 나아가서는 세계가 기다리는 것도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기다림은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사야를 비롯하여 성경 속 위대한 인물들은 모두 하나님의 응답과 약속의 성취를 인내하며 기다린 이들입니다. 메시아가 오실 것을 예언한 이사야의 예언은 700년이라는 긴 기다림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대림절의 기다림은 심판주로 강림하실 그분을 기대하고 고대하는 종말론적인 기다림입니다. 언제일지 또 얼마나 걸릴지도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날은 꼭 올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되 그 날이 언제일지에 관심을 두는 것보다 그날이 언제오더라도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가야겠습니다. 이것이 대림절을 살아가는 신앙의 자세일 것입니다.
아직은 아닙니다.
하지만, 인내함으로 기다리고, 나의 기다림을 넘어 너의 기다림으로 나아가시는 여러분이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신 주님, 오시는 주님, 기다림의 절기 대림절을 맞이하며 우리가 기다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도 합당한 것이 되게 하소서. 자기의 기다림에 매몰되어 너의 기다림과 피조세계가 간절히 고대하며 기다리는 것에 관심 없는 삶을 살아온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주님, 대림절기에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며 또한, 주님이 계신 그곳으로 가게 하옵소서. 우리의 차가운 마음을 버리고 기다림이 주는 마음 쿵쿵거리는 설렘으로 우리의 마음이 뜨겁게 뛰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PT음성설교/ 사전 녹음으로 12월 3일 11시부터 들으실 수 있습니다.
그날을 기다리는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