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절 열세 번 째 주일
신앙은 고백이 아니라 실천이다
마태복음 25:31~46

■ 기쁨의 종말론
마태복음 25장에는 ‘열 처녀의 비유, 달란트의 비유, 최후의 심판의 비유’가 등장합니다. 비유의 공통점은 ‘종말론’과 관련된 것입니다. 열 처녀의 비유를 말씀드리면서 ‘종말론적인 신앙’에 관해 말씀드렸습니다.

종말을 뜻하는 헬라어 ‘파루시아(παρουσια)’는 ‘함께 있음. 현존, 임재, 도착, 오심’이라는 뜻으로 성경이 말하는 종말론은 두려움의 종말론이 아니라 기쁨의 종말론입니다. 성경의 종말은 신랑을 기다리던 지혜로운 처녀들이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것과 같은 기쁨이요, 달란트를 남긴 종들을 주인과 함께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처녀나 주인이 무섭다며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었던 종에게 종말의 순간은 두려운 순간이요, 모든 것이 끝나는 순간입니다. 혼인잔치에 들어갈 가능성도, 주인과 함께 기쁨을 누릴 수도 없으니, 그야말로 모든 것이 끝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도 종말론에 관한 것인데 아주 직접적입니다.
심판의 날에 인자가 모든 민족을 서로 가르되 ‘양과 염소’로 분류한다는 것입니다.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 인자도 모든 사람과 민족을 판단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본문은 단순히 ‘심판의 날이 온다.’는 것을 경고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거기에 중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심판의 기준, 즉, 무엇을 기준으로 심판이 내려지는지에 대해 중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심판의 기준은 모두의 예상을 뒤엎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른쪽에 서 있는 사람이나 왼쪽에 서있는 사람이나 할 것 없이 자신에게 내려진 판결에 대해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사실은 멸망선고를 받은 사람들이 비신자가 아니라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그들이 무슨 나쁜 짓을 했거나 의식적으로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멸망을 선고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심판의 기준은 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나그네를 영접하고, 헐벗은 사람에게 입을 것을 주고, 병든 사람을 돌보아 주고, 감옥에 갇힌 사람을 찾아보는 일을 하였느냐 아니냐에 따라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35,42절을 보면 “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에...”라고 함으로써 주린 자가, 목마른 자가, 나그네가, 헐벗은 자가, 병든 자가, 감옥에 갇혀있는 자가 곧 인자였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인자는 자신을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와 동일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잘 것 없는 사람을 돌본 이들은 하나님 나라를 차지하고, 그들에게 무관심했던 이들은 악마와 그 졸개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 신앙고백인가, 실천인가?

‘최후의 심판’이야기는 신앙고백보다 중요한 것은 실천이라는 것입니다.
신앙고백이 필요 없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신앙고백은 필요하지만, 실천이 없는 신앙고백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에 “나더러 ‘주님 주님’하는 사람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갈 것이다.”하는 말씀과 일치합니다. 야고보서 2장 17절에서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신앙은 고백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구원은 직분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받는 것입니다.
저는 최소한 그리스도인들은 비신자들보다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선하게 살기 위해 힘써야 한다고 봅니다. 신앙 혹은 교리를 내세워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을 차별하고 혐오한다면 거기에 구원은 없습니다.
실천과 관련된 ‘행하다’라는 단어는 오늘 말씀에서는 다양하게 사용되었습니다. 44절에 ‘돌보아 드리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섬기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35절, 38절, 43절에서는 ‘영접하다, 드리다, 주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이들을 섬기며 영접하고 그들에게 뭔가를 나누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날 우리는 신앙의 실천, 행함이 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앙을 고백하는 이들은 많은데 ‘보잘 것 없는 사람’을 섬기는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주린 자들에나 목마른 자들이나 헐벗은 자들이나 병든 자들, 옥에 갇힌 자들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자본주의 맘몬의 사회가 그들에게 실패자라고 손가락질하는 것처럼, 복 받지 못한 삶이라고, 저주받은 삶이라고 비웃습니다. 신앙의 이름으로 사회적인 약자들을 혐오하고 차별하는 일을 하는 이들은 심판의 날, 하나님으로부터 ‘악마와 그 졸개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속’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열 처녀의 비유’에서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 지혜로운 여인과 미련한 여인들의 갈림은 ‘기름을 준비했는지 아닌지’여부에 달렸습니다. 기름을 준비하는 삶은 ‘세상을 편안하고 따뜻하게 만들어가는 사람’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여러분, 가정을 편안하고 따뜻하게 만들어가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것이 기름을 준비하는 삶입니다. 직장을 편안하고 따뜻하게 만들어가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것이 기름을 준비하는 삶입니다. 세상을 편안하고 따뜻하게 만들어가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것이 기름을 준비하는 삶입니다. 여러분이 관계하고 계신 곳을 편안하고 따뜻하게 만들어가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것이 기름을 준비하는 삶입니다.
준비하는 삶을 오늘 최후의 심판 이야기에서는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고, 헐벗은 자들에게 입을 것을 주고, 병든 자를 돌보고, 감옥에 갇힌 자를 찾아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 이들이 혼인잔치, 창세 전부터 준비한 그 나라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가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고백만 한다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신앙고백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가는 것입니다. 실천하는 삶이 기름을 준비하는 삶입니다.
신앙인이라고 해서 별세계에 사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신앙인도 이 땅에서 살아가지만, 세상과 구별되는 삶을 살아가므로 별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별납니까?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손해 보는 삶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구별되는 삶이 유별난 삶은 아닙니다. 구별되는 삶과 유별난 삶은 구분이 되어야 합니다. 구별되는 삶은 거룩함과 연결되지만 유별난 삶은 광신과 연결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 좋아서 읽고, 묵상하고, 필사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만, ‘밤낮으로 주의 말씀을 묵상하는도다(시편 1:2)’라는 말씀을 문자로 읽고 일상의 삶을 하지 않고 그 일만 한다면, 그건 거룩한 생활이 아니라 광신입니다.
신학교 다닐 때 동기들 중에 목사님 자제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목사인 동기들중에서는 아버지의 이중적인 모습 때문에 고민을 많이 하는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교인들에게는 사랑을 말하지만, 가정에서는 아내와 자녀들에게 폭력적이고, 강단과 일상의 삶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는 대부분 졸업을 한 후, 목회가 아닌 다른 일을 업으로 삼았고, 심지어는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신앙고백과 삶이 다른 이들을 예수님은 ‘위선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 곁에 계십니다.
주린 자로, 나그네로, 헐벗은 자로, 병든 자로, 감옥에 갇힌 자로.
이곳에 계신 분들은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보는 눈을 뜨는 복을 누리시고, 예수님께 손을 내미는 신앙으로 심판자이신 주님께서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하시는 복을 누리는 분들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거둠 기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 우리 곁에 계시는 주님, 우리의 눈이 어두워 현존하시는 주님을 보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주님을 외면할 뿐 아니라 배척하고 차별하고 혐오하기도 합니다. 마음의 눈을 뜨게 하셔서 주린 자로 나그네로 헐벗은 자로 병든 자로 감옥에 갇힌 자로 우리 곁에 계신 주님을 보게 하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신앙이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면서 배척하는 미련한 신앙이 되지 않게 하소서. 추운 겨울, 우리의 마음과 손길이 이웃을 향할 때, 그 마음과 손길이 주님을 향하는 것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