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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 11주] 종말론적인 신앙(ppt음성설교포함)

  • 관리자
  • 2023-11-12 13: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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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 열한 번 째 주일(20231112)
종말론적인 신앙
마태복음 25:1~13


오늘은 창조절 열한 번째 주일입니다.
이번 주 성서일과의 공통주제는 ‘모호하게 감추어졌던 진리가 드러날 때에 준비하고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신앙의 모호함에 빠져들면 미련한 처녀들처럼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혼인잔치에 참여하지 못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모호한 신앙적인 주제 중 하나가 ‘종말론’에 관한 것입니다.

여러분, ‘종말론’하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무섭거나 두렵습니까, 아니면 기대가 됩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종말론적인 신앙’을 가져야 한다고 하는데, 종말론적인 신앙은 무엇일까요?
오늘은 ‘종말론’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깨닫고 ‘종말론적인 신앙’을 살아가시는 여러분 되길 바랍니다.

■ 공생애 끝자락에서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은 험난한 가시밭길이 이어졌습니다.
종교지도자들과의 충돌과 그들의 음모, 타락한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예언하시면서 본격적인 재난이 시작됩니다. 종교지도자들에게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심판을 피하겠느냐?(마 23:33)”는 독설도 마다하지 않으십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무너지는 날은 이스라엘에게는 ‘종말의 날’로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저주와도 같은 예언을  서슴치 않으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그때가 언제쯤인지 알고 싶어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그때가 언제쯤인지 알면, 종말에 대비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 아직 끝은 아니다



종말의 때에는 사이비이단이 예수님을 이름을 사칭하고, 전쟁과 지진과 기근, 예수 이름 때문에 당하는 고난, 믿음을 잃고, 서로 미워하고, 거짓 예언자들이 판을 치고, 불법이 성행하는 일들이 일어나, 서로에 대한 사랑이 식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지만, 아직은 끝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 이전에도 이후에도 이런 징조들은 늘 있었기에 사람들은 ‘지금이 바로 종말의 때’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날은 꼭 오겠지만, 그 날과 그 시각은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마24:36).”고 하심으로, 몇 날 몇 시에 종말이 온다는 식의 유언비어에 넘어가지 말라하십니다. 아직 끝은 아니므로 “깨어 준비하고 있으라.”고 하시며 신실한 종과 신실하지 못한 종, 열 처녀의 비유, 달란트의 비유, 최후의 심판의 비유로 종말의 때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 네 가지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오늘 나눌 말씀은 종말과 관련된 두 번째 비유입니다.
 

■ 열 처녀는 누구인가?


본문에 등장하는 열 처녀는 들러리를 서는 신부의 친구로 보는 편이 합당합니다. 신부의 친구들은 신랑을 맞이하고, 신랑과 함께 혼인잔치에 참여하여 친구의 결혼은 축하해주고 잔치에 참여하여 함께 기쁨을 나눕니다. 예수님 당시 보통 보름달이 뜨는 시기에 맞춰 혼인 날짜를 정했습니다. 낮에는 덥기 때문에 어둑해지기 시작하는 오후에 신랑이 도착하고, 신부친구들은 등불을 밝히고 신부의 집으로 신랑을 안내하고 함께 혼인잔치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생겼는지 날짜도 넘기고 게다가 한 밤중에 신랑이 옵니다. 정해진 날짜가 지났고, 한 밤중이다 보니 기다림에 지친 처녀들은 졸음을 이기지 못합니다. 지혜로운 처녀라고 해서 지혜롭지 못한 처녀들과는 달리 졸리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지혜로운 처녀나 지혜롭지 못한 처녀나 모두 기다림에 지쳤고, 잠이 쏟아졌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별세계에 살지 않습니다. 신앙인도 이 땅에서 살아가므로 세상 사람들과 같은 한계성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인간의 한계 밖에 있지 않으며, 역사의 현실 밖에 있지 않습니다.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 슬기로운 처녀와 미련한 처녀 


신랑의 도착이 늦어지기에 열 처녀는 모두 지쳐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보아라, 신랑이다, 나와서 맞이하여라!” 외치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자다 말고 깜짝 놀란 처녀들이 등불을 밝히는데 미련한 처녀들의 등불은 꺼져갑니다. 기름이 떨어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슬기로운 처녀들은 기름을 나누지 않았습니다. 열 처녀 모두 똑같이 기다림에 지쳐 잠이 들었고, 외치는 소리에 깨어났습니다. 그러니 이 비유에서 슬기로운 처녀와 미련한 처녀의 갈림은 ‘기름을 충분히 준비’했는가 여부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슬기로운 처녀들이 기름을 좀 나눠주지 야박한 것 아닌가?’하시기도 하지만, 이 비유의 초점은 나눔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름을 준비하는 것’이 각자의 책임이듯, 하나님 나라, 신앙과 관련된 것들은 모두 각자의 책임이라는 말씀입니다. 신앙생활은 누가 대신 해줄 수도 없고, 다른 이의 신앙덕분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는 것입니다. 신앙은 각자, 자기의 몫입니다. 이것이 기름을 나눌 수 없는 이유입니다. ‘기름을 충분히 준비한 슬기로운 처녀’같은 여러분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등불과 기름의 상징


‘기름’은 다양한 상징으로 해석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오늘의 비유에 국한해서 해석해 봅니다. 신랑이 온 시간은 ‘한 밤 중’입니다. 보름달이 환하게 떠있다고 하더라도 ‘한 밤중’은 어둠이 깊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삶’을 기름을 준비하고 등불을 밝히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두들 어둠과 짝하더라도 빛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신앙, 그것이 등불을 밝히는 신앙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등불은 단지 어둠을 밝히는 용도만으로 사용되지 않습니다. 미명의 어둠에 빛나는 등불을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요즘, 교외에 나가보면 카페나 식당 같은 곳에 장식용으로 전구를 줄이어 달아놓은 것을 보게 됩니다. 그 빛으로 인해 분위기가 좋아집니다. 덴마크는 휘게 문화가 발달된 나라인데 휘게란  편안함, 따뜻함, 아늑함, 안락함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또는 혼자서 보내는 소박하고 여유로운 시간, 일상 속의 소소한 즐거움이나 안락한 환경에서 오는 행복을 뜻하는 단어로도 사용되는데, 이런 휘게의 시간에 빠질 수 없는 것이 조명입니다. 덴마크의 조명은 은은하고, 은은한 조명에 초를 밝혀서 안락하고 따뜻하고 편안한 느낌을 줍니다.

이렇게 세상을 편안하고 따뜻하게 만들어가는 사람, 그런 신앙인이 바로 등불을 밝힐 기름을 준비하고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 파루시아(παρουσια) = 종말


종말을 뜻하는 헬라어는 ‘파루시아(παρουσια)’는 신약성경에 24회 나옵니다. ‘함께 있음, 현존, 임재, 도착, 오심, 도래, 출현’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본래 이 단어는 황제나 왕이 식민지 도시를 방문하는 데서 유래되었습니다. 황제나 왕은 자신의 위용을 드러내기 위해서 식민도시를 방문할 때에는 세금을 거둬서 도로나 건물을 신축하고, 기념주화를 만들기도 하고, 방문 기념제사도 성대하게 치렀습니다. 황제나 왕이 오는 날은 거룩한 날이여 영광의 날로 지켜졌습니다. 

성경의 ‘파루시아’는 여기에서 따온 것입니다. 그래서 파루시아는 ‘오심’이라는 의미와 ‘지금 여기에 계신다(현존)’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종말은 기쁨의 종말론입니다. 예수님이 오시니 희망차고, 기대되고,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의 기대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단사이비는 이 희망찬 종말론을 어둡고 두려운 것으로 변질시켰습니다. 31년 전인 1992년 10월 28일, 휴거소동을 벌였던 다미선교회와 같은 시한부종말론은 예수님의 재림도 없애버리고, 자신들이 직접 하늘로 올라가겠다고 소동을 부렸을 뿐 아니라, 세상적인 것은 물론이요 가족들까지도 다 버리게 함으로 ‘지금 여기’를 없는 것처럼 여기게 했습니다. 종말론의 변질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보수교회 일각에서는 ‘지금 여기’를 지워버리고 사후세계만 강조하며 죽은 후의 ‘천국’만 강조합니다.

그러나 참된 종말신앙은 천국소망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동시에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며 사는 것이 곧 천국소망을 가진 신앙인들의 생활임을 강조합니다.
 

■ 개인적인 종말


열 처녀의 비유를 다시 묵상해 봅니다.
등불을 밝힐 기름준비는 누가하는 것입니까? 개인이 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종말론’이라고 하는데, ‘지금 주님이 나를 부르시면, 나는 주님 앞에 기꺼이 갈 것이며, 이 종말적 부르심은 역사적인 종말과 상관없이 내게 먼저 임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임하기 전에 내가 먼저 부름 받을 수 있으므로, 그리고 그 때가 언제일지 모르므로 매일매일, 하루하루, 종말을 맞이할 수 있음을 알고 ‘지금 여기에 현존하는 삶’을 제대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깨어있는 삶이고 준비하는 삶입니다. 이런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성령께서는 도우시는 것입니다.
 

■ 기름을 준비하는 삶


오늘날 한국교회에 만연하는 종말론은 예수님의 종말론과는 다릅니다. 예수님이 신랑처럼 오시어 현존하시는 것으로서의 종말론, 지금 오고 계시며 동시에 여기에 계시는 분을 믿는 이들은 ‘그 때가 언제인가?’하는 관심보다는 ‘기름을 준비하는 삶’에 초점을 맞춥니다. 31절 이하 ‘최후 심판의 비유’에서는 어떤 삶이 기름을 준비하는 삶인지 분명히 밝힙니다. 마태복음 25장 35,36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 주었다”

 

■ 말씀을 정리하며


사랑하는 한남교회 교우 여러분, 종말론적인 신앙은 우리를 어둡고 무섭고 두려운 삶이 아니라 기쁘고 행복하고 기대되는 삶으로 인도합니다. 단, 준비된 자들에게만 그렇습니다. 슬기로운 신앙인이 되시어 종말의 때에 슬기로운 처녀들처럼 신랑과 함께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기쁨을 누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거둠 기도]



처음이요 마지막이신 하나님, 부활의 신비를 믿고 사는 우리들이 올바른 종말론적인 신앙관을 가지고 살게 하옵소서. 지금 여기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하시고, 지금 여기로 오시는 하나님을 기쁨으로 맞이하게 하옵소서. 주님 오실 때에 준비하고 깨어있는 지혜로운 신앙인이 되게 하옵소서. 그 때가 언제인지 아는 것보다 그 때가 언제이든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는 깨어있는 신앙인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pt 음성설교 종말론적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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