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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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9주]새로운 삶의 방식(마태복음 23:1~12)

  • 관리자
  • 2020-11-01 20: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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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9주/ 11월 1일
새로운 삶의 방식
마태복음 23:1~12


지난 주, 산책길에 공원벤치에 앉아 곱게 든 단풍과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었습니다. 제가 앉은 건너편 벤치에서는 70대 중반의 어르신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 중 한 분은, 마치 자신이 한국의 정치판을 다 꿰고 있는 듯 큰 소리로 상대방을 설득하고 있었습니다. 목소리가 너무 커서 귀 기울이지 않아도 무슨 내용인지 다 들렸는데, 가짜뉴스와 정치성향에 편승한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들이었습니다. 그분은 사실, 대화하는 상대방에게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맞은 편 벤치에 앉아있는 나도 의식하며 자기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를 바라며 큰 소리로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나는 저렇게 나이 들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분은 나를 힐끔힐끔 보면서 자신의 생각에 동의해주기를 바라는 눈치입니다. 이때 문득 스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설교자에 대한 생각이었습니다. 설교자의 권위를 가지고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며 강요한다면 어떻게 될까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즘 기사나 언론에서 ‘그루밍’이라는 단어를 종종 봅니다. ‘그루밍’이란, 길들인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아니라 동물에게 쓸 법한 이 단어가 요즘은 ‘성범죄’와도 연결되어 사용됩니다. 피해자의 심리를 지배해 성폭행을 행사하는 것을 ‘그루밍 성범죄’라고 하는데, 피해자는 자신이 성폭행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성범죄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사와 학생, 성직자와 신도, 복지시설의 운영자와 아동, 의사와 환자 등 서열이 확실한 경우에 많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루밍 범죄’는 안타깝게도 개신교에서 많이 일어나고 있는데, 성범죄는 물론이고, 한 사람의 정신을 피폐화시키고, 가정을 파괴하고, 사회를 혼란스럽게 할뿐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데 일조하고 있습니다. 길들여진 신자들의 행동은 기이합니다. 교인들이 보는 앞에서 부모의 뺨을 때리기도 하고, 인분을 먹기도 합니다. 때리라하고 먹으라 하는 이도 문제지만, 길들여졌기에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그대로 하는 이들도 문제입니다. 그러면 교단이나 총회가 이것을 문제라고 막아주어야 하는데 면피할 길을 열어줍니다. 이러는 사이 한국교회는 더는 추락할 곳이 없을 지경까지 추락했습니다.



현재 한국교회의 소위 ‘성직자’와 ‘교인’과의 관계는 상당히 기형적입니다.
일반적으로 대형교회를 이룬 목사들은 상전을 넘어 거의 하나님 대접을 받고, 교인들은 목사 만나기가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눈길 한 번만 마주쳐도, 악수 한 번만 해도 감지덕지입니다. 그러나 목사가 아무리 신실해도 대형교회를 이루지 못했으면 머슴취급 당합니다. 많은 교인들이 대형교회 목사들의 설교에 ‘그루밍’되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담임목사가 “콩으로 메주를 쑨다.”해도 믿지 않다가 대형교회 목사나 소위 인기 있는 목사가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아멘!”입니다. 그러니 너도나도 대형교회에 청빙 받으려하고, 대형교회를 이루려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설교자는 자신의 생각과 주장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기 위해서 힘쓰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과 말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생각은 버려야합니다. 설교는 선포되는 것이지만, 교인들에게 선포되기 전에 먼저 자신에게 선포되는 말씀이며, 자신이 선포한 말씀대로 살아가기 위해 설교자가 먼저 솔선수범해야 합니다. 그래서 설교가 어려운 것입니다. 설교자의 삶이 없고, 행동이 없고, 문자풀이나 하고, 내용 없이 “아멘!”만 강요한다면 설교가 아닙니다.



이런 이들이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실 때에도 있었습니다.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비판하신 내용을 통해서 우리 신앙의 방향성을 가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로, 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곧 율법을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율법의 본래 목적은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모든 사람들이 풍성하게 누리며 살아가게 하려는 수단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는 종교지도자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을 옥죄는 수단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옥죌 뿐 아니라, 율법을 자기들의 편의대로 해석해서 죄인들을 양산해 냈습니다. 누구도 지킬 수 없는 율법으로 길들여 죄의식에 빠져 살아가게 만든 것입니다. 이제, 그들의 율법이 곧 모세의 율법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있는 오늘날의 설교자들 같습니다. 자기의 뜻에 따라 말씀을 풀고, 말씀을 취사선택하여 남들을 정죄합니다. 요즘, 교계에서 뜨거운 감자가 하나 있습니다. ‘차별금지법’이 그것인데 성소수자들에 대한 조항에 대해서 보수교회를 중심으로 ‘차별금지법=동성애법’이라며 반대합니다. 반대하는 근거는 성서가 ‘동성애를 금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차별금지법 성소수자와 관련한 부분 어디에도 동성애를 조장하는 내용은 없다는 점입니다. 그런데도 가짜뉴스까지 동원해서 정치이슈화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우리 삶에서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비성서적인 수많은 일들에 대한 금지조항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으며, 언급조차도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자기들 편의대로 말씀을 취사선택하고 오용하면서 저주의 말씀을 축복의 말씀으로, 축복의 말씀을 저주의 말씀으로 오용하며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있습니다. 마치, 예수님 시대 모세의 자리에 앉았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되어야 하고, 선포하는 자는 일차적으로 자신에게 그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남들에게 이렇게 저렇게 살아야 한다가 아니라, 자신이 먼저 그렇게 살기위해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그들은 말만하고 행동하지 않습니다.
말은 번지르르하고 행동이 없습니다. 창조절 7주에 데살로니가전서 말씀을 전하면서 ‘믿음의 행위,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행동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믿음에는 행동이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행동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이 말씀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것은 ‘믿는다고 착각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폭탄선언인 셈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모세의 율법을 곡해하여 해방하는 법이 아니라 옥죄는 법으로 만들었습니다. 무거운 짐을 잔뜩 지어준 것이지요.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신들은 율법을 잘 지키는 구별된 자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말씀대로 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만,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행동은 아주 열심히 했습니다. 삶이 되지 않으니 ‘empty suit’를 좋아합니다. 경문 띠를 넓게 하고, 옷술을 길게 합니다. 요즘 대형외제차를 선호하는 목사들과 박사가운을 입고 예전을 집례하는 목사들이 그 후손들이겠지요. 사람들은 그런 외형적인 모습이 ‘속빈 강정’인줄도 모르고 그들을 잔치에 윗자리에 앉히고, 회당의 높은 자리에 앉히고, 랍비라하고, 지도자라고 불러줍니다. 말만하고 행동하지 않는 사람들의 얄팍한 행동입니다. 이런 행위를 예수님은 꾸짖으시고, 비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신앙인이 되기 위해 힘쓰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아멘!”으로 화답했다면, 그 말씀을 삶으로 살아가기 위해 힘쓰십시오. 그런 과정에서 말씀의 신비를 깨달아가는 것입니다. 말과 행동이 다르지 않은 멋진 분들이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낮아지고 섬기는 자가 되라 
예수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위선적인 신앙을 비판하신 후에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낮아지고,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진정 큰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큰 자 = 권위 있는 자’입니다.
권위란, 자기 스스로 세우려한다고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권위는 주어지는 것입니다. 권위는 하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낮아지고 섬기되 높아지기 위한 섬김과 낮아짐이라면 위선입니다. 그냥, 낮아지고 섬기는 삶이 몸에 습관적으로 배어 있어야 합니다.



낮아지고 섬기는 것은 비굴한 것과 다릅니다.
진짜 용기 있는 자만이 낮아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꺼이 섬깁니다. 낮아짐과 섬김을 통해서 내면의 기쁨을 누리고, 내면의 기쁨은 그 사람을 빛나게 합니다. 데이비드 브룩스의 <두 번째 산>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저자는 우리의 삶에는 두 개의 산이 있는데, 첫 번째 산은 자신의 성공을 이루는 산이요, 두 번째 산은 타인을 위해 살아가는 헌신의 산이라고 합니다. 첫 번째 산이 자아를 세우고 자기를 규정하는 것이라면, 두 번째 산은 자아를 버리고 자기를 내려놓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첫 번째 산은 정복하려고 기를 쓰며 살아가지만, 두 번째 산에 있는 이들은 자신을 내려놓음으로 기쁨이라는 큰 선물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첫 번째 산에 올라 우쭐거리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두 번째 산을 바라보라고 권면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첫 번째 산도 의미가 있지만, 두 번째 산에 이르러야 참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지요. 저와 여러분은 두 번째 산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 산을 향해 갈 때, 계곡을 만날 수 있고, 내리막길이나 협곡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산이란 본래 그런 것임을 알기에 낙심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 산에 우뚝 서는 여러분이시길 바랍니다. 그것은 곧, 낮아지고 섬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있어야 낮아지고 섬길 수 있다는 점에서 ‘타인과의 관계성’을 전제로 합니다. 그래서 신앙공동체인 것입니다. 공동체성의 회복, 타인과의 관계의 회복, 이것이 바로 새로운 삶의 방식입니다.



제가 설교 서두에 말씀드린 공원에서 만난 70대 중반의 어르신에게 결여된 것은 이것입니다. 자신만 있고, 자기의 주장만 있습니다. 다른 생각을 하는 이들에 대한 배려가 없습니다. 배려만 없는 것이 아니라 혐오합니다. 

새로운 삶의 방식은 낮아지고 섬기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말로는 쉽지만 삶으로 살아가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올라야할 ‘두 번째 산’입니다. 자기를 너무 강하게 주장하지 마십시오. 상대방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고,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은 왜 그런 생각을 할까 이해하려고 노력도 하십시오. 이것이 낮아지고 섬기는 삶이요, 이렇게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내면의 빛이 충만해져서 높임을 받을 것이요, 이런 높임이야말로 참된 권위를 부여할 것입니다. 낮아지고 섬기는 삶을 살아감으로 높아지는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거둠기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섬김의 도를 몸소 보여주신 주님, 말과 행동이 다른 이들에게 낮아지고 섬기는 삶을 살아가라 하셨으니,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 같은 귀한 삶의 나날들을 자신만을 위해 살아감으로 허비하지 말게 하시고, 이웃을 섬기는 삶을 살아감으로 내면의 빛이 충만한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이 땅의 낮고 연약한 이들을 보듬으며 살게 하시고, 그들의 아픔을 깊은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음성설교듣기
http://www.podbbang.com/ch/1775820?e=23864412

동영상설교보기
https://youtu.be/55F47ZukX-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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