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절 여덟째주일(20231022)
집과 향수병
누가복음 15:11~32
리처드 로어와 함께 하는 종교개혁의 달 네 번째 시간입니다.
첫 주에는 ‘인생의 전반부와 후반부’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눴습니다. 많은 사람이 인생의 후반부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지만, 누구에게나 인생의 후반부는 옵니다. 인생의 후반부가 있다는 것을 아는 이들은 인생 전반부의 삶을 다르게 살아갑니다.
둘째 주에는 '인생의 전반부'라는 주제로 균형 잡힌 생각, 균형 잡힌 시각, 균형 잡힌 신앙을 위해서는 필요한 아픔과 필요한 실패, 필요한 내리막길이 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셋째주일에는 ‘삶의 비극성에 대한 감각’에 관해서 나눴습니다. 선하게 살고자 하지만, 돌아보면 죄인 중의 괴수인 나를 발견하는 것은 비극이지만, 이런 감각은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겸손한 신앙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오늘은 ‘본향’에 관한 주제입니다.
천상병 시인의 ‘귀천’이라는 시로 시작합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이 시는 1970년 발표되었는데, 1967년 동백림 사건으로 큰 고초를 겪어 심신이 초토화되었던 시인은 고문으로 인해 망가진 몸과 간첩이라는 누명 속에 살아가는 일그러진 삶을 마치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는 소망을 품었던 것 같습니다. 1993년 ‘아름다운 이 세상의 소풍’을 마치고 하늘로 돌아갔지만, 많은 이들은 시인의 ‘아름다운 이 세상의 소풍’은 1967년 끝났을 것이라고 합니다. 가톨릭 신자였던 천상병 시인이 돌아가리라고 했던 하늘은 무엇일까요? 굴곡진 이 땅의 삶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이 세상이었다.’고 말할 그 ‘하늘’은 무엇이었을까요?
■ 본향을 향해 가는 존재
‘귀(歸 돌아갈 귀)’는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어디로 돌아갑니까? 온 곳으로 돌아갑니다. 온 곳은 곧 본향입니다.
리차드 로어는 본향을 그리워하며 앓는 아픔을 ‘향수병’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향수병은 본향을 그리워하는 이들에게만 발병합니다. 본향,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없는 삶은 갈 곳 없는 삶이요, 갈 곳이 없으니 걸어갈 길도 없어 방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본향을 향해가는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가기 싫어도 때가 되면 온 곳으로 가는 존재로 창조된 것입니다. 창세기의 말씀을 기억해 보십시오. 우리는 흙으로 지음을 받았고(2:7),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는(3:19) 존재입니다. 그러면 흙이 우리의 본향입니까? 인간은 그냥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허무한 존재입니까? 만일, 이 땅의 삶이 전부라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인간은 흙으로 창조되었지만, 그 안에 하나님께서 생명의 숨을 불어 넣으심으로 새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저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가 아니기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를 구원하시어 영원한 본향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 향수병(homesick)

병(sick)은 아프고, 고독하고, 슬프고 소외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저마다 병드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를 발견하는 순간 우리는 향수병에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나와 너’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한 가족이라는 자각을 하게 되면 향수병에 걸리게 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향수병에 걸리기 전에는 이웃의 아픔과 나의 아픔은 별개입니다. 나만 잘 살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향수병에 걸리게 되면, 이웃의 아픔이 곧 나의 아픔이 됩니다. 팔레스틴에서 전쟁의 포화 속에서 죽어가는 이들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됩니다. 지구온난화로 인해 죽어가는 동식물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됩니다. 온갖 차별과 혐오 속에서 소외당한 이들의 슬픔과 고독이 나의 고독이 됩니다. 이렇게 타인의 아픔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이것을 공감이라고도 합니다.
■ 집(home)
그러나 집은 모든 것으로부터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공간입니다. 외부와 차단되어, 자신의 안락함에 젖어 살면 이웃의 아픔을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저마다의 가치관, 이념, 생각으로 저마다의 집을 짓고 삽니다. 집은 하나의 안전장치지만, 여기서 떠나지 않는 사람은 편견과 착각과 편협함 때문에 왜소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12:1)”고 하실 때에 단순히 공간만 떠나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안전장치로 삼고 살아가던 삶에서 떠나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삶으로 떠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제자들은 모두 ‘집’을 떠난 이들이었습니다.
사울이 다메섹 도상(행 9)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회심한 사건은 그 이전 견고하던 자신의 신앙적인 가치관에서 떠났음을 의미합니다. ‘집’은 삶의 안전장치지만, 안락함에 젖어 살아가는 순간부터 본향을 그리워하는 향수병에 걸릴 수 없는 감옥에 스스로를 가두는 것입니다.
■ 탕자의 비유
누가복음에는 ‘잃어버린 것’을 찾아나서는 예수님의 비유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세상적인 말로 바꾸면 ‘가출한 것을 찾아 나선 이야기’입니다. ‘가출’은 ‘집을 나갔다’는 뜻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가 좀 더 크고 진짜 집을 찾기 위해서는 집을 떠나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어린 아들과는 달리 큰 아들은 충직하게 아버지의 집을 잘 지켰습니다. 물론, 이것도 복된 삶이지만, 그보다 더 복된 삶은 집을 나갔다 돌아온 아들의 삶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큰아들과도 같은 삶을 살았던 이들이 바리새인들이었고, 사두개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이 손가락질하던 죄인들만큼 큰 은혜를 입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살았다고 여겨지던 그들이 오히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본향에 가까운 삶을 살았습니다.
탕자의 비유를 묵상하면서 저는 ‘신앙의 가출’에 대한 생각을 했습니다.
신학교 시절, 어릴 적부터 가졌던 신앙이 흔들리면서 방황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깨어짐’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큰 충격으로 목사가 되고자했던 꿈도 접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시기가 있었기에 다시 신앙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 저의 신앙은 더 깊어졌습니다. 각자가 지은 신앙의 집이 저마다 있을 것입니다. 그 신앙의 집보다 더 큰 집에 들어가려면, 그 집을 떠나야 합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면, 우리가 좀 더 크고 진짜 집을 찾기 위해서는 집을 떠나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 본향은 어디에 있는가?
기독교에서 본향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천국, 하나님 나라입니다. 저는 천국이라는 단어가 ‘죽은 뒤에, 저곳’을 상기시키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을 더 좋아합니다.
‘천국-The Kingdom of Heaven’과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는 같은 것일까 다른 것일까요?
‘천국’이란 용어는 마태복음에만 37번 나옵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위한 복음서였고, 유대인들은 ‘하나님’이라는 단어의 사용을 철저히 금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개역성경에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용어가 124번 언급됩니다.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는 동일한 표현입니다. 그러나 한국교회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천국’이 다른 곳처럼 여겨지는 이유는 ‘천국’은 이 땅에서 성도의 모든 삶을 마치고 난 후 가게 될 사후세계 정도로 이해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 천국 곧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지 못하면 그곳은 죽어서도 그들에게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 선포합니다.
■ 우리를 본향으로 인도하시는 성령
이 본향을 우리 스스로 찾아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인간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비극성입니다. 이런 비극성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지난주의 말씀이었습니다. 복음이란, 우리가 완전해서가 아니라 불완전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본질적으로 비극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를 집에서 집으로 인도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온전히 우리를 위하여 존재하시는데 ‘우리가 우리를 위하는 것보다 더 우리를 위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는 사랑보다 큰 것처럼, 성령은 우리가 우리를 돕는 것보다 더 많이 도우실 준비가 되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과 협력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성령은 이미 협력할 준비가 다 되어있습니다. 남은 것은 우리의 결단입니다. 본향으로 향하는 삶의 여정, 하나님과 함께 숨 쉬며 걸어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본향으로 가는 길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본향으로 가는 길은 직선도 아니고 넓은 길도 아닙니다. 오히려 나선형이고 오르막, 내리막길이고 좁고 험한 길입니다. 하지만, 본향에 대한 향수병을 깊이 앓는 사람들은 본향을 향해 위험을 무릅쓰고 앞으로 나아갑니다. 이것이 아름답고 멋진 후반부 인생입니다. 그런 삶을 살아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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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가게 하시며, 그 길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 본향에 대한 향수병 없이 살아가는 이 시대를 불쌍히 여기소서. 자기의 집에 갇혀 영원한 집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 우리는 모두 본향을 향해가는 존재임을 깨닫게 하시어, 지금 우리를 도와 본향으로 인도하시 성령님과 협력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